[갈팔질팡하더라도 갈 만큼은 간다] 


<지데일리> 쉰이라는 나이를 ‘천명을 안다’라고 표현한 공자의 말처럼 오십이 됐다고 해서 모두가 어느 날 갑자기 식견이 확 늘거나 하진 않지만 그 나이쯤 되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한다.

 

“나는 뭔가?”, “잘 살아오기는 한 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삶의 의미를 되짚어 보는 시간엔 살아온 삶에 대한 반추의 과정이 동반되게 마련. 1970~1980년대에 청년기를 보내면서 산업화의 격랑에 휘말리고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본 세대에게 이런 생각들은 특히 더 간절하다. 


점점 커져 가는 빈부의 차이, 여전히 얼어붙은 남북 관계와 같은 젊은 날 고민했던 거시적인 문제들은 가뿐히(?) 넘겨 버릴 수 있을지 몰라도, 실제 삶에 해당하는 일상의 무게는 버겁기만 하다. 


자꾸 주변부로 밀어내려고만 하는 사회, 경제적 부담, 가족 간의 소통, 주변의 시선들 등 어느 것 하나 녹록한 게 없다. 긴 인생, 자칫 낙오하는 거 아냐, 라는 염려가 가슴 끝을 파고들기도 한다.

 

<갈팡질팡하더라도 갈 만큼은 간다> 이상경 지음ㅣ양철북 펴냄


<갈팡질팡하더라도 갈 만큼은 간다>는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았고, 이제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우리 시대 아버지가 들려주는 에피소드다. 그때 그 시절을 환기하는 따뜻한 이웃들과 친구들의 이야기, 자신의 성장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텔레비전은커녕 라디오도 흔치 않던 때 시골 집집마다 대청 기둥이나 시렁에 됫박만 한 유선 스피커가 달리기 시작한 게 그 시절이었나 보다. 온종일 나오는 것도 아니어서 해가 설핏 넘어가는 저녁 무렵이 되면 깨금발을 딛고 단 하나 달려 있는 스위치를 딸깍 오른쪽으로 돌린다. “찌지직” 하는 낯선 전자음이 잠깐 들리고 나서 방송이 흘러나왔다. 경쾌한 시그널 음악이 차츰 잦아들면 “어린이 시간”이라고 다소 과장되게 말하는 여자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정말이지 천상의 소리가 따로 없었다. (…) 그 어린 시절 한때 내 마음에 뭉게뭉게 스며들던 ‘이야기’의 추억은 여전히 새롭고, 아릿하고, 유효하다. 나는 스피커에, 걸리버에, 그리고 이름 모르는 성우들에게 크게 빚진 셈이다.

 

넙데데한 얼굴에 바른 새빨간 구찌베니가 인상적이었던 이웃집 형섭이 엄마, 일 원에 네 권 볼 수 있던 만화책을 더 보려고 친구들과 짜고 속였던 만화방 아저씨, 하얀 블라우스에 멜빵 달린 진남색 주름치마가 예뻤던 첫사랑 경옥이, 라면 한 봉지씩 손에 흔들며 희섭이가 앞장서 부는 트럼펫 소리에 맞춰 희섭이네 골방 아지트로 몰려다녔던 우리들, 유신 철폐를 외치다 가게 된 징역살이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들….

 

이렇게 젊은 날을 되돌아보며 자신이 꿈꿨던 세상에 대한 가치들을 꺼내 놓는 지은이의 옛날이야기는 그 시절을 함께 겪어냈던 지금의 동년배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준다.


그 시절의 따뜻했던 이야기들, 친구들 간의 우정,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같은 그 당시의 가치들이 앞으로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거라는 그의 고백은 그래서 더 의미 있어 보인다.

 

지은이가 이 책에서 풀어 놓는 스물여덟 개의 에피소드, 즉 옛날이야기들은 지금의 나를 만든 시간들을 만나러 가는 일종의 시간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는 1960년대 가족 공동체ㆍ농촌 공동체가 온전하게 작동하던 시절 그 무렵부터 시작한다. 


외할매와 함께 지내며 그 쏟아 붓는 듯 하던 사랑을 받았던 기억, 외갓집 초가지붕에 새 이엉을 얹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와서 도와주던 그날의 풍경, 동네 아낙들 앞에서 맛깔스런 솜씨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던 외할매, 그리고 큰댁에서 사촌 형제들과 자치기, 연날리기에 하루해가 짧았던 에피소드 들은 모두가 따뜻하고 그리운 정이 넘치는 풍경들이다. 


이웃 간에 문을 꼭 걸어 잠그고 사는 각박한 현대인들에게 “우리가 예전에는 이렇게 살았었지”라고 환기시킬 수 있는 그런 모습들이다.

 

세상을 다스리는 어른들은 아이들이 웬만큼 나이를 먹기 무섭게 머리부터 빡빡 깎이고 나서 덜 자란 육체를 검정색 교복 안에 가두고 목둘레에는 빳빳한 스탠드칼라를 달아 목이 졸리도록 호크를 채운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칼라 위로 살짝 드러나게 칼날처럼 얇은 흰색 플라스틱 띠를 그 안에 끼우게 해서 아이들이 교복을 입을 때마다 느끼게 될 낯선 이물감을 통해 “이제 너희들은 우리 어른들이 정해 놓은 삼엄한 질서 안에 포획되어 꼼짝달싹하지 못하는 따분한 신세로 변해 버렸다. 순순히 말을 들어야지.” 하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것 같았다.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산업화가 시작되고, 유신이라는 암흑의 사회 체제가 공고해지던 시절, 지은이가 풀어 놓는 이야기들엔 세상을 향해 오만 가지 촉수를 뻗쳐 날 선 비판 의식을 가져 보려던 나름의 세상 읽기가 담기기 시작한다. 


군사 문화의 잔재로 폭력이 난무하던 고등학교의 살풍경들, 불공정한 학생회장 선거를 겪으면서 느끼게 된 부조리, 부정한 독재 권력에 저항했던 대가로 영어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합천 아재사건 등에서 비폭력, 공명정대,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의 소중함을 깨닫고 조금씩 성장하는 작가는 이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잊고 있던 청춘의 꿈을 다시금 꿨을지 모른다. 먹고사는 문제에 매몰되느라 잊었던 가치,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생각들이 바로 그것이다.

 

1980년대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며 청춘을 불살랐던 세대, 세대 구분으로 뭉뚱그리고 통틀었을 때에는 이 사회의 주류로 대접받지만, 개인별로 봤을 때 인생 2막을 준비해야 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삶의 목표ㆍ희망을 되찾아 줄 따뜻한 위로와 용기가 필요하다.

 

출판 일을 평생 업으로 삼아 밥을 벌던 지은이 역시 똑같이 이 시기에 용기와 위로가 필요했다. 어느 날 자신의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하고, 탈 서울을 감행할 때 주류 사회의 질서와 시선에서 마냥 자유로울 수만은 없었던 것처럼, 사회와 회사, 가정에서 계속 등이 떠밀리는 동년배들에게 자신을 만든 시간들을 만나는 과정이 인생 2막을 시작하는 데 밑바탕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인생 전반전을 갈무리하는 과정에서 얻은 깨달음, 우리를 옥죄는 기존 질서와는 다른 새로운 가치들, 앞으로의 인생에 이러한 생각들이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소중한 힘이 될 것이라는 확신은 지은이에게 큰 축복이었다.

 

현재의 삶을 좀 더 끌어안을 수 있기를 바라는 지은이는 그때 그 시절을 함께 돌아보며 치기어리지만 그 시절의 향수를 느껴보길,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도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길 바라고 있다.



한주연 기자 gdaily4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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