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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교사가 바라본 '조선 1860'
    문화 2013. 4. 1. 17:32

    [편지 따라 역사 여행]


    “조선 사람들에게 서로 돕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여러 번 우리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천주교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형제애를 실천하는 것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50여 년 전, 1860년대에 조선에 들어와 살았던 프랑스인 선교사가 십여 명 있었다. 이들이 보낸 편지와 보고서, 선물로 보냈던 조선의 물건들은 무려 반년 동안 지구의 반을 돌아 프랑스 선교회 본부까지 전해졌으며, 지금껏 잘 보관되고 있다. 비행기는 물론 자동차도 없던 그 시대에 편지가 파리까지 전해졌다는 것부터 놀랍다. 그렇다면 편지는 어떻게 파리까지 갈 수 있었을까.


    ✊<편지 따라 역사 여행> 조현범 지음, 강전희 그림, 너마학교 펴냄


    <조선에서 파리까지 편지 따라 역사 여행>은 150년 전 조선에 들어와 살던 프랑스인 선교사 다블뤼 주교가 파리로 보낸 편지의 여정을 따라 당시의 세계를 보여 주는 그림책이다.


    다블뤼 주교는 김대건 신부와 함께 조선에 와 20년 넘게 살다가 1866년 체포돼 처형당했다. 이는 병인양요의 직접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그의 눈에 조선 사람들은 늘 자연스럽게 서로를 돕고 작은 것이라도 나누며, 판소리와 음식을 즐기고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이런 내용을 담은 편지들은 약 반년 동안 지구 반 바퀴를 돌아 파리에 도착했다. 백령도와 상하이, 홍콩, 수에즈와 알렉산드리아항구를 거치는 오래된 뱃길을 따라서였다. 이 책은 편지 길을 통해서 본 세계 역사 여행이다. 인도와 홍콩, 베트남이 차례로 식민지가 되는 등 서양의 거센 침입과 세포이 항쟁이 보여 주듯 민족의식이 움트는 현장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책은 무엇보다 사진과 그림 자료를 바탕으로 섬세하고 아름답게 당시의 세계를 재현했다. 이방인 프랑스인 선교사의 눈을 통해 보는 조선의 모습도 흥미진진하다. 하나로 연결된 격동기 1860년대의 세계를 한눈에 살펴보며, 역사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키워 주는 역사 그림책이다.


    ❐ 편지에 담긴 조선과 세계의 풍경은?


    책에 담긴 다블뤼 주교가 보냈던 편지의 여정과 내용을 보면, 한복을 입은 다블뤼 주교가 충청도 산골 작은 방에서 빼곡하게 쓴 편지를 보고 있다. 십자가와 호롱불, 좌탁 등은 당시 선교사들과 수녀들이 살던 방의 풍경 그대로다. 주교는 반년 치의 편지와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내는 선물을 함께 잘 싼다.


    이 편지 꾸러미는 사람의 손에 들려 산을 넘고 백령도에 닿는다. 백령도에 조기잡이와 무역을 위해 왔던 중국 배는 선교사들의 접촉 수단이기도 했다. 새벽녘에 이 배에 몰래 실린 편지 꾸러미는 상하이에 도착해 조차지에 있던 선교회 사무실에 배달된다.


    다블뤼 주교의 편지는 극동아시아의 선교사들이 보낸 편지들이 다 모이던 이 선교회 사무실에서 분류된 뒤 유럽으로 가는 큰 상선에 실린다. 상선에 실린 편지는 서양의 상선과 군함들로 붐비던 홍콩 항과 마카오를 거쳐 뜨거운 인도양을 항해한다. 적도의 무더위를 뚫고 항해한 배는 뭄바이 항구를 거쳐 수에즈 항구에 도착한다. 아직 운하가 없던 시절, 편지는 기차로 갈아타고 알렉산드리아 항구까지 달린 뒤 프랑스의 증기 우편선에 실려 마르세유 항구에 도착한다. 천 년 가까운 기간 동안 서양과 동양을 이었던 뱃길을 따라 갔던 것이다.


    우편제도를 국가가 맡아 정비했던 프랑스에서는 우편열차에 실려 단 하루 만에 마르세유에서 파리까지 편지가 전해졌다. 이때 프랑스는 나폴레옹 3세가 다스리며 현대적인 모습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오스만 남작이 주도했던 도시계획으로 정비된 파리의 모습은 우편마차를 빼면 지금의 파리 전경과 매우 비슷하다.


    가족과 선교회의 답장과 선물들은 왔던 방향과는 반대로 다시 긴 항해에 오른다. 반년이 걸려 폭풍과 해적에게서도 무사히 빠져나온 답장과 선물들은 다블뤼 주교에게 도착해 따스한 위안이 된다. 아래의 지도를 보면 이 여정이 얼마나 길고 험난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 세계 곳곳의 풍경은 각기 독특하고 다양하다. 조선이나 중국처럼 전통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서양의 침입을 받아 서서히 변화해 가는 아시아의 모습은 안타깝다. 상하이 곳곳에는 조차지가 설정되고 홍콩은 식민지가 됐으며, 가난한 중국 농민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있었다. 영국의 지배를 받던 인도에서는 ‘세포이 항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현대 지구촌을 만든 이 격동기의 역사적 사건들을 여정을 따라 가며 보다 보면 서양이 현대의 ‘기준’처럼 된 것은 우월한 문명의 힘이 아니라 오히려 무력을 동원한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는 것을 저절로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조선 후기, 철종 시대라 하면 세도정치와 삼정문란으로 인해 매우 어지러웠다고 배운다. 하지만 유럽만이 문명국이라고 여기던 이방인인 다블뤼 주교의 눈에 비친 조선인들의 삶은 그렇게 몇 줄로 요약되지는 않는다.


    다블뤼 주교는 우선 조선 사람들이 즐기는 판소리가 유럽의 연극보다 소박하지만 기분을 정말 풀어 준다며 칭찬하고, 조선의 공동체 문화에 대해서도 높게 평가했다.


    화재가 나거나 이웃집에 큰일이 있으면 내남없이 가진 것을 나누어 주고 집을 지어 주는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천주교의 ‘형제애’보다 더욱 감동적이라고 쓰고 있다. 식습관이나 과음에 대해 관대한 모습에 대해서는 다소 과장되게 비난하기도 한다.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던 시기에는 괴로움을 호소하기도 하지만 다블뤼 주교는 가족에게도 따스하고 재치 넘치는 편지를 많이 보냈다.


    다블뤼 주교는 1866년에 체포돼 사형 당한다. 이를 계기로 프랑스는 병인양요를 일으켰고, 왕조실록과 의궤를 비롯한 많은 유물을 약탈해 가기도 했다. 이런 침입의 명분이 됐으므로 서양인 선교사들에 대한 비판만 주로 돼 왔다. 그러나 이들이 남긴 조선에 대한 이해와 생각들은 조선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 주는 면이 있기도 하다.


    손정우 기자 <함께하는 우리들의 세상이야기 ⓒ지데일리 gdaily4u@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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