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미쳐, 시원한 해풍과 입안에 감도는 짭조름한 기운에 중독돼 평생 동안 바다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한 남자가 있다.


사진_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ㅣ한창훈 지음ㅣ문학동네 펴냄.jpg 그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거문도에서 태어나 걸쭉한 남도 입담으로 바다와 섬의 이야기를 우직하고 집요하게 기록해온 작가 한창훈. 그러나 수권의 책을 펴낸 지금도 그는 식자 든 사람으로서 바다를 구경하고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거문도에서 ‘주어야독(晝漁夜讀)’하며, 어부들과 해녀들 사이에 섞여 몸으로 바다를 살아내고 있다.


≪인생이 허기질 때 바다로 가라≫는 한창훈의 온몸에 문신처럼 새겨진 바다의 기억과 일곱 살 때부터 시작한 ‘생계형 낚시’ 40년의 일화를 엮은 책이다.

 

책은 국내 한 일간지 지면에 지난 2009년 봄부터 올해 여름까지 연재한 원고를 토대로 신문지상에서 못다 한 바닷 속 숨은 이야기들과 직접 찍은 시원한 바다 사진들을 모아 바다를 담았다.


30종의 ‘갯것’들을 맛깔나게 먹는 법, 잡는 법, 다루는 법과 함께 바닷사람들의 애틋한 삶의 면면까지 자연스레 녹여낸 이 책은 바다와 섬, 그리고 그에 기대 사는 모든 생명들에 관한 생생한 기록 그 자체다.


지은이는 200년 전 조선시대의 해산물 박물지라 할 수 있는 정약전의 <자산어보>에서 책의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바다를 좀 안다고 생각했는데 <자산어보>를 읽고서 아예 좌절을 했지 뭔가. 이 애물단지를 어떻게 해야 하나 몇 년을 고민하다 결국 에세이 여는 글로 삼기로 했네. 이른바 ‘한창훈식 <자산어보> 해제’라 할 수 있지. (정약전은) 실학자라 해도 양반이었단 말이지. 평생 생선은 밥상 위에서나 구경했을 법한 양반이, 아무리 유배 중이었다 해도 비린내 풍기는 생선을 요리 뜯어보고 조리 헤집어보며 연구하고 기록을 남겼다는 게 중요한 거요. 그때만 해도 갯일은 천한 일이 아니었던가.”


낚시는 물었을 때와 물지 않았을 때, 두 가지의 인간이 만들어진다. 낚아내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백지장처럼 하얗게 기억이 없다. 생각은 사라지고 몸만 작용을 하는 것이다. 오로지, 도망치려는 물고기와 잡아올리려는 사람 사이 힘의 기우뚱한 균형, 줄이 터지기 직전까지만 허용하며 녀석을 지치게 하는 긴장의 순간들만 이어진다. 낚시에 빠진 동료작가 한 명은 이 순간을 오르가슴과 같다고 표현했다.



여느 어부들과 다름없이 먹고살기 위해 바다에 낚싯대를 늘어뜨리고, 홍합과 생선을 다듬으며 바닷사람들의 삶 깊숙이 파고들었던 지은이는 도시인들의 ‘레저형 낚시’와는 차별화하는 의미에서 스스로를 ‘생계형 낚시꾼’으로 정의하며, 온갖 생명들이 꿈틀거리는 생활의 터전으로서의 바다를 묘사한다.

 

갈치, 고등어, 꽁치, 문어, 볼락, 삼치, 홍합 등 익숙한 해산물들에서부터 처음 보면 까먹어야 할지 깨어 먹어야 할지, 음식인지 돌덩이인지 당최 어리둥절한 ‘거북손’, 건드리면 보라색 체액을 울컥 쏟아내는 ‘군소’ 등 섬사람들에게는 백사장만큼이나 익숙하지만 도시인들의 눈에는 마냥 신기하기만 한 해양생물들에 이르기까지, 한창훈의 자산어보에서는 우리가 식탁에서 그저 식재료로만 여겼던 온갖 갯것들이 저마다의 생명력을 얻어 고유한 이력과 맛 들을 뿜어낸다.


책은 우리가 몰랐던 해산물 맛있게 즐기는 요령과 섬사람들의 상차림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지은이는 “사실 이것, 말 안 해주고 싶다. 두고두고 나만 먹고 싶다”며 능청을 떨면서도 각 해산물들의 진미를 느낄 수 있게 하는 궁극의 상차림을 두런두런 털어놓는다.

 

한창훈 작가.jpg 

 

도시인들이 눈 동그래질 해산물들의 비화 또한 흥미롭다. 혹시 문어가 자신의 다리를 잘라먹고 산다고는 말을 들어본 적 있는지. 이에 대해 지은이는 “배가 너무 고프거나, 저가 먹어봐도 맛있거나, 둘 중 하나는 확실하다”고 말한다. 또한 맛깔 나는 밥반찬 갈치는 이따금 다른 방식으로 입에 들어가기도 하는데, 갈치 비늘의 구아닌은 립스틱의 주성분 중 하나라고 한다. 지은이는 이를 두고 “키스는 남녀가 갈치 비늘을 주고받는 행위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표현한다.


이 책엔 바다 내음과 파도가 철썩거린다. 바다를 껴안고 호젓하게 살아가는 섬사람들의 아기자기한 일상이 가슴속에 수런거린다. 바닷 속에서 숨 참아가며 바다가 허락한 먹을거리 캐올리는 해녀들의 가쁜 숨비 소리와 밤배 타고 나가 어린것들과 아낙을 먹이는 애비라는 이름을 지닌 어부들의 애틋한 사랑이 절절히 녹아 있다. 아울러 바다에서 태어났거나 이따금 휴가철 바다로 가서 위안을 받지만, 현재는 바다와 멀리 떨어져 대도시에서 아옹다옹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