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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소설과 에세이가 난무하는 시대다. 이제 전업 작가는 물론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도 소설과 에세이를 쓰고 한 권의 책으로 내는세상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온라인상으로는 수많은 사람이 글을 쓴다. 이 가운데 소수는 큰 주목을 받기도 한다.
이러한 세태에 다소 비판적인 한 혹자는 이러다 우리 집 강아지도 글을 쓰겠다고 나설지 모르겠다며 한탄했다. 이러한 현상은 그만큼 문학이 뭇 사람에게 열려 있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또 그만큼 가벼이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반짝하고 등장해 주목받았다가 소리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그 방증이다.
이에 반해 이병주 문학은 그 궤도를 달리한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현대사회에서 이병주는 이제 고릿적이 돼버린 옛 작가다. 그럼에도 그의 글은 주머니 속 송곳처럼 밖으로 도드라져 다시금 재조명, 다시 발굴되고 있다. 이병주는 사상과 문학, 철학과 문학, 정치와 문학, 역사와 문학 사이에서 끝없이 고민하며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했던 치열한 작가였다.
≪문학을 위한 변명≫은 이병주 문학의 정신 기조라 할 만한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문학은 보다 인간적인 진실, 나아가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이란 뭣일까, 이에 이르는 지혜가 무엇일까 하는 점에서 불도와 합일한다. 설혹 문학이, 인간의 행복은 끝끝내 불가능한 것이라고 증명할 경우에 있어서도 행복에의 동경을 포기할 수 없을 때 불도의 테두리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엔 이병주의 극적인 인생 체험과 글 읽기, 글쓰기가 만나는 지점을 말하고 있다. 가식 없는 솔직한 진술은 문학과 역사, 철학에 대한 폭넓은 견식을 바탕으로 문학과 인생의 의미에 눈을 뜨게 해준다.
또한 이병주 문학 인생의 시초가 되는 독서 체험과 함께 그의 개인적 체험이 세계와 역사 속에서 문학의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한 흔적이 여실히 담겨 있다. 이병주에게 무한한 영감을 준 도스토옙스키의 극적인 인생의 한 토막을 소개한다.
대학 시절에 할 일도 많겠지만 만사 제쳐놓고 책 읽는 버릇과 책 읽는 재미를 익혀두도록 하라. 그렇게만 되면 이 세상에 태어난 최저한도의 보람은 찾은 셈이 된다. 잘만 하면 최대한의 보람의 될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재미만 익혀두면 어떤 궁지에 빠지더라도 결정적으로 불행하게는 안 된다. 최악의 인간이 될 까닭도 없다. 동해로 고래 잡으러 갈 때도 허먼 멜빌의 《모비 딕》을 읽고 있으면 고래 잡는 흥미와 재미는 세 배, 아니 서른 배나 더 될지 모른다.
이병주 문학론에는 사상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학인의 입장이 명명되어 있다. 역사의 격랑과 장난 같은 운명 속에서 문학의 위치가 어디여야 하는지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함으로써 분명하게 지정한다.
억압의 시대 한복판에서 전후좌우 살피며 어디로 나아야가 할지 고민했던 이병주는 결국 좌우도 전후도 아닌 대각선의 길을 택한다. 즉 문학인은 문학과 역사, 문학과 철학, 문학과 종교, 문학과 사상 중 어느 한쪽을 택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가로지름으로써 종국엔 그 종착점이 인간이어야 함을 분명히 한 것이다.
어떤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면 문학은 필연적으로 비굴하게 된다. 문학이 바다이면 이데올로기는 강줄기다. 문학이 이데올로기를 재단할망정, 이데올로기의 재단을 받아선 안 된다. 문학이 이데올로기를 가르칠망정, 문학은 정치까지를 포함한 인생을 상대로 하는, 어디까지나 활달해야 할 작업의 영역이다. (…) 문학이 봉사해야 할 곳이 있다면 그것은 (…) 오직 인간일 뿐이다.
이병주는 이 세상이 각박한 원인은 바로 문학의 고갈에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종교의 자리를 문학이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할 만큼 생에서의 문학의 위치를 가장 높은 곳에 뒀다. 문학이 사회의 각 영역에 관류해야만 우리의 생활이 더욱 인간화된다고 믿었다. 이는 문학인으로서 더 강한 자부심을 보이는 부분이다.
아직도 미발굴된 이병주의 글은 첩첩 숨어 있다고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그의 자전적 에세이와 문학론을 통해 삶과 문학, 인간과 문학의 관계에 대해 가슴 깊이 고뇌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