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아름다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이 맘껏 뛰놀 수 있는 마을 뒷산을 불필요한 개발로부터 지켜 주는 어른들, 아이들을 위해 게임기를 가게 앞에서 거두는 문구점 사장님, 아이들과 자전거로 유럽을 횡단하는 택견 사부님, 아토피가 있는 아이들을 위해 유기농 아이스크림을 파는 카페, 아이들이 꼬물꼬물 자기 물건 갖고 나와 보자기에 펼쳐 놓고 사고팔며 경제 관념을 자연스럽게 익히는 보자기장터, 장애가 있는 아이들과 장애가 없는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놀 수 있는 교육을 고민하는 마을학교, 장애가 있는 친구들이 구운 맛난 쿠키를 파는 미니샵, 엄마 아빠가 늦게 퇴근해도 아이들을 돌봐 주는 믿음직하고 다정한 이웃이 있는 마을. 무엇보다도 아이들끼리 서로를 돌보며 놀다가 알차게 익는 마을.


사진_우린 마을에서 논다ㅣ유창복 지음ㅣ또하나의문화 펴냄.jpg 내일은 더 나을 거라고 다독여 주는 훈훈한 돌봄이 있는 마을에서 내 필요와 욕구로 마을기업을 만들고 일자리를 만들어 일터의 주인,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바로 성미산마을과 주민들의 이야기다.


텅 빈 무대 위에 내가 서 있다. 올해 2010년 겨울, 극단 무말랭이 단원으로 나는 무대에 섰다. (…) 처음엔 그 끝이 아득해도, 둘러보면 아무도 없이 나 혼자 미친놈 널뛰듯 하는 것 같아도, 막이 오르고 사람들의 눈빛이 우리에게 집중되고 연출의 큐 사인이 나면 우린 한데 얼려 굿판을 벌인다. 나도 살고 너도 살고 함께 살자는 눈물겨운 굿판을. 그게 바로 지난 십여 년 내가 성미산에서 산 한 줄 삶인 것만 같다. 그리고 거기에 아직껏, 후회는…, 없다.



≪우린 마을에서 논다≫는 여자들이, 노인들이, 몸과 마음이 각기 다른 속도로 자라는 어린아이들이 풀과 나무, 작은 생명들과 함께 즐겁게 살 수 있는 품을 만드는 마을. 성미산마을에 대한 이야기다.


“아이들에게 고향을 만들어 주고 싶었어요. 살기 좋은 곳만을 의미하는 게 아닌 우리들만의 추억이 있는 곳, 오랫동안 함께 기억할 수 있는 공간, 그것이 고향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려면 어른들이 이 동네에서 오래오래 같이 살 수 있어야만 했다. 어린이집 말고 새로운 뭔가가 없으면 어른들의 관계가 중단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아이들이 자라나면서 몇몇 집은 이사를 가고 한동네 살아도 전처럼 그렇게 긴밀하지 않게 된 것이 슬슬 모두의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생협의 상무인 상호엄마는 마을에 살면서 “동네에서 함께 살던 사람들이 이사 가는 것이 제일 싫었다.”고 한다. ‘우릴 버리고 대체 왜 가나?’ 속상하기도 했단다. 뭔가 새로운 관계의 끈이 필요했다. 좀 더 많은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는 마당이 필요했다. ‘먹을거리’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지난 6월 성미산마을극장에선 성년식이 열렸다. 이 마을에서 자라 성년을 맞은 아이들을 위한 의례다. 갓난쟁이, 코흘리개 아이들이 성인이 된 것처럼 마을도 같이 나이를 먹었다. 이러기도 어느새 열여섯 해. “우리 아이 함께 키운다”는 일념으로 우리나라 최초 공동육아협동조합이 있는 서울 마포구 동네로 하나 둘 씩 모여든 맞벌이 부부들이 있었다. 그들은 아이들이 날마다 나들이하는 마을 뒷산 성미산이 사라질 위기에 놓이자 지역 주민들과 합심해 산을 지켜 내면서 ‘성미산마을’이란 이름을 얻는다.

 

그들은 2년여 성미산을 지키는 과정에서 도시 속 공동체의 싹을 틔우고 기운을 모은다. 일 년에 한 번 마을축제를 벌이다 축제를 날마다 하고 싶어 갖가지 마을동아리들의 놀이터인 성미산마을극장을 만들고, 삶과 앎이 일치하는 마을학교를 꿈꾸며 12년제 대안학교 ‘성미산학교’를 세우고는 기운을 소진할 만큼의 녹록치 않은 깔딱고개를 세 번이나 마주한다.


성미산학교 이야기를 글로 푸는 일은 수년이 지났어도 내게 무척 힘든 작업이다. 글감을 찾으려 기억을 더듬기 시작하면 그 당시의 상황과 감정이 생생히 살아나 도저히 ‘거리 두기’가 안 된다. 학교가 엎어졌다 일어서기를 반복한 것처럼 나의 글쓰기도 엎어졌다 일어서기를 거듭하는 중이다.



그러나 지은이 유창복을 비롯한 성미산마을 사람들은 공동육아어린이집을 운영하며 체득한 소통법으로 “마을에서 하는 일은 안 되는 일이 없다” “어쨌든 된다”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난관을 극복해 나가며 ‘불패 신화’ ‘끝 모를 낙관주의’ ‘정시 도착 신화’를 만들어 간다. 삶을, 세상을 일관된 자세로 낙관하고 있는 이들은 오늘도 새로운 일을 벌일 생각에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