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양적으로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이렇데 된 것의 중심엔 과학기술이 자리하고 있다. 과학기술이 그동안 인간의 생활을 다방면에서 편리하게 해줬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인간에게 힘들고 어려운 것들을 기계와 도구들이 대신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편리한 세상인가.


사진_옛것에 대한 그리움ㅣ김종태 지음ㅣ휘닉스 펴냄.jpg 그러나 그 편리함 뒤에 감춰진 문제점들이 속속 우리의 의식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


인생의 행복은 무엇이며, 삶의 가치란 무엇인가 하는 등 고민들이 문득 떠오를 때 우리는 너무 빨리 달려오지 않았나 하는, 그래서 무심코 잊어버린 것들에 대한 것들과 마주치게 된다. <옛것에 대한 그리움>은 이렇게 사라져가는 풍경들에 안겼던 우리 부모 세대와 자신의 이야기다.


맷돌질은 동양에서는 음양의 결합으로 남녀의 성적 결합을 의미하기에 맷돌질은 풍요와 생산을 상징한다. 춘향전에서 이도령은 춘향과 어우러지면서 <너는 죽어  독매(맷돌) 위짝이 되고 나는 죽어 밑짝이 되어 슬슬 두르면 나인 줄을 알려무나>라고 희롱하고 있다. 서양에서 맷돌은 사물을 변화시키는 것 또는 숙명으로 인식되고 있다. 또 맷돌은 형벌, 부활, 순교 등을 상징한다. 우리는 퍼질러 앉아 일도 노는 것처럼 찧고 빻고 으깨고 갈고 문지르면서 세월에 깎이면서 온몸으로 세상을 살았다. 인생은 결코 칼로 자르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가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몸이 편한 것만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고된 시집살이로 파김치가 된 며느리에게 저녁 지을 쌀 한 되를 내주며 시어머니는 뉘 한 주먹을 섞어 주었다. 며느리는 고단한 몸으로 일부러 섞은 그 뉘를 하나하나 골라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비인간적이고 비생산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고된 날의 연속이었던 그네의 일상을 생각하면, 뉘를 고르는 일은 쉬는 시간이나 다름이 없다.


지금은 과거가 준 귀한 선물


우리나라 사람들은 싸울 때 먼저 상대방을 때리지 않는다. 팔을 걷어붙이고 "말리지 마”하면서 말싸움을 한참 한 뒤 겨우 멱살이나 잡고 실랑이를 한다. 그러면 대부분 옆의 친구가 싸움을 뜯어말리고 양쪽은 말리는 사람한테 서로 자신이 옳다고 주장을 하는 이상한 싸움을 한다. 말리지 말라는 말은 말려 달라는 말이다. 둘만 있을 때는 좀처럼 싸우지 않는다. 누군가가 옆에 있어 싸움도 말리고 중개도 할 때 시비를 거는 습성이 있다. 둘이 싸워서 옳고 그른 것을 판결 내리는 서구식의 맞대결문화가 아니라 제 3자를 끼워 넣어 자신이 옳다는 것을 제 3자가 판단하여 주기를 바라는 복덕방문화인 것이다.



지은이 김종태는 그동안 우리가 변해가는 것에 대해 너무 무심했다고 아쉬워한다. 우리는 후진국이란 딱지가 싫어서 무조건 외국의 변화를 눈감고 좇아 왔다. 세계에 내놓고 자랑할 만한 우리의 문화유산도 비합리적 비생산적, 비효율적이란 누명을 씌워 파괴해 버리고 신사대주의를 따랐다. 인간의 생활, 가치, 정신문화를 자로만 재려고 들었다. 선진국의 모든 제도는 합리적이고 효율적이고 가치 있고 교육적이란 속단 아래 여과 없이 도입하고 추종했다. 그는 물질의 편리함 뒤에 숨은 정신의 황폐화를 지적하며 “우리의 것을 올바른 눈으로 다시 보고 가치를 찾고 맥을 이어 자랑할 만한 것은 세계에 널리 알리고 가슴 떳떳한 긍지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렇다고 옛것이 무조건 좋고 그리운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우리 조상들이 어떤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모른 채 무턱대고 현재의 물질만을 향유하는 것은 문화적으로 세련되지 못하다는 지은이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