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일이 있을 때면 나는 그런 아빠를 하나씩 꺼내 보며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아직도 나는 누군가 나에게 아빠가 죽은 게 아니라 먼 이별을 했을 뿐이라고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큰딸 선혜)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중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하고 공장으로 떠밀려야 했던 시절. 그래서 대기업, 대공장에 첫 출근하던 그날, 첫눈을 맞은 것처럼 설렜던 사람. 1987년, 그 눈부시던 여름, 바로 당신과 당신의 누이와 당신의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거리에서 민주주의를, 공장에서 노조를, 작업장에서 인간다운 대우를 외쳤던 사람. 어느 날 갑자기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선 기업과 국가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며, 평생을 몸 받쳐 일했던 일터에서 그만 나가 달라고 요구하는 세상에 맞서야 했던 사람. 결국 무참히 파괴된 노조와 일터와 가정을 뒤로 하고 어느 해 겨울 새벽, 외로이 분신으로 세상을 등질 수밖에 없었던 사람.

 

누구보다 두 딸을 끔찍이도 아끼던 자상한 아버지였으며, 가압류로 ‘0’이 찍힌 통장, 손이 부끄러워 마지막으로 수도꼭지라도 고쳐 주고 떠나야 했던 남편이었고, 가난 때문에 중학교조차 보내 주지 못한 아버지를 위해 길에서 주운 꽁초를 털어 담배를 만들어 줄 줄 알았던 속 깊은 아들이었던 사람. 노조에서는 고상한 이념을 늘어놓기보다는 덩실덩실 춤을 추며 흥을 돋우던 동료였고, 자리에 대한 욕심 하나 없이 대의원만 십 년을 하며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던 사람. 돌보지 못할 두 딸과 아내의 얼굴이 어른거려도 고생하는 동료들 생각에 노조 일을 놓지 못했던 바로 그 사람.

 

두산중공업 보일러 공장에서 집채만 한 보일러 패널을 주무르던 그 사람, 배달호는 2003년 1월9일 새벽, 단조 공장 옆 노동자 광장 한 귀퉁이에서 외로이 분신으로 세상을 등졌다. 이튿날, 그의 월급봉투에 찍힌 돈은 단돈 2만5000원. 단지 자유롭고 인간다운 회사를 꿈꾸었을 뿐인 평범한 노동자는 왜 그리운 아버지, 원망스러운 남편, 다시 만날 수 없는 친구가 돼야 했을까? 도대체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인간의 꿈 - 배달호 평전>은 우리와 ‘동시대’를 살았던 한 노동자, 배달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1953년 태어난 배달호의 삶은 1987년 민주화와 1997년 IMF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 시대 평범한 노동자들의 인생사를 아우르고 있다. 책은 배달호의 가난했던 어린 시절에서부터, 1970, 80년대 굵직한 현대사의 격류 속에서 노동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중공업 대공장 노동자들의 삶이 펼쳐진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 버스 운전 기사였던 아버지는 사고가 나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가는 일이 다반사였고, 그래서 생계를 도맡아야 했던 어머니는 남의 집 일을 해서 그나마 자식들 밥은 굶기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배달호는 중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한 채 일찍부터 집안 살림을 도와야 했고, 제대 후에는 바로 중소기업에 입사해 돈을 벌었다.

 

1981년 1월, 한국중공업에 처음 입사하던 날 배달호는 ‘이제는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첫눈을 맞은 것처럼 설레었다. 그리고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와중에 배달호가 다니던 한국중공업에서도 노조가 만들어졌다. 노동법은 물론이고 ‘노조’란 말조차 들어본 적이 없던 이들은 모두 같이 운동장에 모여 사장을 세워 놓고 임금 인상을 외치면서 평등이란 것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제 공장에서 그들은 더 이상 공돌이가 아니라 노동자로 설 수 있었지만, 그것도 잠시뿐 그들은 또 다른 세상의 파도에 맞서 싸워야 할 운명이었다.

 

1987년을 거쳐 그들이 애써 일궈 놓았던 삶은 1997년 IMF 이후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물결에 휩쓸리면서 파괴돼 가기 시작했다.

 

‘민영화’라는 말만 들어도 한중 노동자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간의 경험으로 봤을 때 민영화는 곧 정리 해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국영기업이 ‘사기업’으로 넘어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노동자들은 직감으로 알았다. 그들은 살아오면서 한국 자본들이 노동자들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가 전혀 없다는 것을 몸으로 겪었다. 경영이 나빠지면 모든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했고,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기 바빴다. 한중 노동자들 역시 민영화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를 심각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1997년 말 외환위기 이후 경제가 어렵다는 이유로 정리해고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됐고, 한중 노동자들도 어떤 식으로든 희생해야 한다고 강요받고 있었다. 그 방식은 바로 ‘민영화’였다. 정부는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민영화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사실 한중은 10년째 흑자를 기록하고 있던 우량 기업이었다. 일방적으로 진행된 민영화 발표에서부터 대기업 간의 빅딜을 거쳐 5조 원이 넘는 자산을 가진 한중이 3057억에 두산에 매각되기까지 그 어디에도 20년을 몸 바쳐 일해 온 노동자들의 자리는 없었다. IMF 경제 위기 탈출을 명분으로 진행되었던 김대중 정권의 공기업 민영화 과정은, 곧 노동자들을 희생양으로 해 대기업의 배를 불리는 과정의 시작일 뿐이었다.

 

“그대 자본가들, 그렇게 살아서 행복하신가”

 

이러한 과정을 거쳐 한중에 입성한 두산은 인수 자금 3057억 원 가운데 계약금으로 겨우 300억을 내놓고 경영권을 행사하면서 정리해고를 시작했다. 정리 해고와 성과급, 연봉제를 통한 차등 관리, 노조의 존립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극단적인 탄압, 파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노조와 반복되는 극한 대립. 민영화 이후 노동자들이 일반적으로 겪어야 하는 이와 같은 수순은 두산중공업에서도 고스란히 현실이 됏다. 30퍼센트에 달하는 인원의 정리해고와 일반 조합원까지 포함한 파업 참여자들에 대한 대량 징계, 일방적인 단협 해지, 그리고 65억에 달하는 손해배상 소송과 개인 재산뿐만 아니라 통장과 임금, 퇴직금, 부동산까지 가압류하는 잔인한 노조 탄압 속에서 현장은 무참히 파괴됐다.

 

그리고 결국 노조는 항복이나 다름없는 타협안을 받아들이고, 현장으로 복귀하게 된다. 징역을 선고받았던 배달호도 보석으로 풀려나 현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동료들은 감옥에서 돌아온 그에게 말조차 걸지 않을 정도로 멀어져 있었다. 그렇게 무참히 파괴된 현장에서 그는 돌아온 지 한 달도 못 되어 세상을 등졌다. 차갑고 냉정한 세상에 대해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더러운 세상, 악랄한 두산, 그리고 미안합니다”였다.

 

자신들을 외면하는 동료들 옆에서도 그들에 대한 따뜻한 온기를 잃지 않았던 배달호, 그토록 따뜻한 사람이었기에 동료들이 파괴돼 가는 모습을 견디기 힘들어했고, 남에게 밟히지 않고 자신의 존엄을 지키는 방법에 대해 날마다 생각했을 그. 평범한 한 노동자가 ‘구원’이자 ‘대안’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마지막까지 인간다운 삶에 대한 고민을 포기하지 않았던 데 있었다고 지은이 김순천은 말한다.

 

자신을 밟고 가기를 원했다. 출퇴근 시간에 오며 가며 회사에 다니는 모든 동료들이 자신을 밟고 가기를. 쿨링타워 후미진 곳에 자신을 묻으니 그렇게 자신을 딛고 다시 살아 주기를…. 세상의 못된 사람들이,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인간 이하로 만들더라도 거기에 주눅 들지 말고, 오히려 당당히 그들까지 변화시키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세상을 만들어 주기를! 회사가 변하지 않는 한 노동자들의 삶이 변하기 쉽지 않다 하더라도 그렇게 해주기를 바랐다. 얼음 조각처럼 날카로운 추위에 살은 이미 얼어붙었지만 그의 뼈는 불타오른 듯 뜨거웠다. 희미해지는 회색빛 공장 건물 사이로 동료들이 하나둘 노동자 광장에 모여들었다. 광장은 점점 짙은 하늘색 작업복을 입은 동료들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그 동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배달호는 어린 아이처럼 즐겁게 호루라기를 불고 있었다.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들의 삶이 신자유주의의 격랑에 휩쓸려 어떻게 파괴돼 가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썼다는 르포 작가 김순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모든 대기업의 노조에 대한 탄압과 그로 인한 한 평범한 노동자의 비극적 서사를 써내려 가면서도, 차갑고 냉정한 세상에서 ‘인간답게 살고픈 꿈’과 동료들에 대한 따뜻한 온기를 잃지 않았던 한 개인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을 잃지 않는다. 공식적인 기록은 말할 것도 없고 일기조차 남아 있지 않은 지극히 평범했던 한 인간의 삶을 되살려 내기 위해 작가는 주변인들의 기억들을 끼워 맞추며 당시 대공장 노동자들의 일상사와 그 속에서 나타나는 보편적인 인간의 삶을 되살려 내고자 했다.

 

이런 노력은 1980년대 당시 마산·창원 지역 노동자들의 일상사와 가정생활, 공장 생활에 대한 생생한 묘사에서 잘 드러난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 평범한 인간이 무엇 때문에 노조를 하게 되고, 무엇 때문에 그 일을 계속하거나 하지 못하게 되는지, 이 땅에서 노조를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도 잘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