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대에 우리 학문이 어떻게 자생력을 확보하면서도 세계적으로 교류해 나갈 것인가 하는 것은 학계의 큰 과제로, 우리 학계에 꼭 필요한 작업으로 전해진다. <우리 학문이 가야할 길>은 서구 중심으로 재편된 학계에서 우리 학문이 자생력을 키울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사진_우리 학문이 가야 할 길ㅣ한국학술협의회 지음ㅣ아카넷 펴냄.jpg 책은 국내 다양한 학문분야의 현황을 점검하는 동시에 우리 학문의 새로운 가능성과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분야와 상관없이 우리 학계가 늘 고민해왔던 문제들을 대담 형식으로 엮었다. 학계의 양적 팽창에 따른 문제, 번역과 관련된 문제, 최근 부쩍 불거진 영어 강의 문제, 학문의 융복합 경향에 따른 문제 등 우리 학계 공통의 문제를 짚어보고 있다.

 

책에서 김광억(서울대 인류학과), 김두철(고등과학원 원장), 이태수(인제대 철학과) 세 학자들이 참여해 우리 학문의 현황에 관한 심도 높은 토론을 벌인다. 이들은 서구 중심으로 재편된 학계에서 우리 학문이 자생력을 키울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한다. 김광억 교수는 문화 간의 이동 혹은 통관 과정의 고민이 담긴 원전의 번역 없이 이차적인 연구서의 번역이 주류를 이루는 현실이 우리 학문의 자생력을 떨어뜨린다고 진단한다. 이태수 교수는 최근 부쩍 강조되는 영어 강의와 외국어 논문에 문제를 제기하며 국제 교류를 활성화할 필요는 있지만 우리말로 이뤄지지 않는 학문 활동이 어떻게 우리 문화의 수준을 높이는 데 기여하겠느냐고 꼬집는다. 또 국내 학자들은 동료 학자의 작업에 무관심한 경향을 보인다는 김두철 원장의 말에 동의하며 단순히 유행처럼 융복합 학문을 내세울 게 아니라 학문 간의 소통을 위한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19세기까지 우리 학문의 중심지는 중국이었고 사용되는 언어도 당연히 한문이었다. 이어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우리에게는 학문 활동이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 학자들이 학문 활동을 한 것은 겨우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약 50년 정도로 잡을 수 있다. 그러나 서구 학문과 학자들을 좇기에 바쁜 ‘학문의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이런 학문적 상황에서 세 학자가 다루고 있는 한국 학문의 자생력 문제는 지금 꼭 필요한 논의로, 글로벌 시대에 우리 학문이 어떻게 자생력을 확보하면서도 세계적으로 교류해 나갈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우선 장경렬 서울대 영문과 교수는 문학이 ‘과학화’의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과학과 기술 공학의 시대에서조차 과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인간적 삶을 살아갈 것이고, 이에 따라 과학의 영향을 떨쳐버리려는 저항 없이는 ‘문학 연구다운’ 일급의 문학 연구를 포기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김경현 고려대 사학과 교수는 제국이나 패권 중심의 ‘낡은 세계사’에 대한 대안으로 탈서구 중심주의를 내세우는 ‘새로운 세계사’를 제시한다. 그렇지만 ‘중심 없는 세계사’가 과연 모두에게 만족스러웠는가 하는 점은 결국 의문으로 남는다.

 

이진우 포스텍 인문사회학부 석좌교수는 한국 철학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란이 오히려 학문의 발전을 방해한다고 본다. 다양한 사상을 창의적으로 통합하는 것이 21세기의 철학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고 주장한다.

 

세계 금융위기 이후 주류 경제학에 대한 비판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김균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이를 경제학이 아직 경험과학으로서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보지만, 그래도 젊은 세대에게서 희망을 찾는다.

 

최정운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우리가 우리 정치 공동체에서의 삶의 문제를 우리의 눈을 통해서 스스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는 한국 정치를 제대로 출발시키기 위해서는 지적 기반이 필요하다고 보고 반지성주의의 극복을 통해 이를 해결하길 바란다.

 

부산대 사회학과 김성국 교수는 사회학에서는 우리 사회의 탈근대적 전환에 집중한다. 김성국은 서구 비판사회학의 전통을 재점검할 때가 되었다고 보고, 차이를 존중하고 차이들 간의 협동을 강조하는 ‘존중과 상호부조의 사회학’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황익주 서울대 인류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 인류학의 학문적 위상이 낮은 까닭이 한국 인류학이 적실성의 도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던 데 있다고 본다. 따라서 연구의 무게중심을 비교한국학에 두고, 방법론의 다각화를 통해 단기적 연구에 대한 사회적 수요에 부응하자는 실천 방안을 내세운다.

 

성균관대 심리학과 교수인 도경수는 사회와 기술의 변화에 따른 심리학의 연구 문제, 연구 방법, 설명 틀의 변화를 되짚어본다. 그는 기술과 통계의 발달에 힘입어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연구가 수행되길 기대한다.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의 장영민 교수는 각 분야별 현안으로 제기되고 있는 법(률) 문제에 대하여 법을 발견하는 일이 법학의 현대적 과제이자 영원한 주제라고 한다. 그는 변호사 시험 합격률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 로스쿨이 왜곡 운영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걱정한다.

 

책은 문학을 비롯해 역사학, 철학, 경제학, 정치학 등 각 분야별 학자들이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학문의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에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