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인간의 삶도 변화하고 있다. 그 결과 현대의 인간은 과거의 인류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사진_기술의 영혼ㅣ에도아르도 본치넬리 지음ㅣ김현주 옮김ㅣ바이북스 펴냄.jpg 그러나 이 시점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인간의 삶이 기술의 발전에 따라 변화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기술이 아무리 빠르게 발전한다고 해도 우리가 곧바로 체감할 수 있는 변화는 없다는 것이다. 가령, 전구가 처음 등장해 어두운 밤을 밝혔을 때, 인간은 그것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었지만, 그 비전이 통신·방송 사업 등으로 구체화된 것은 전기의 혜택을 누리고 자란 세대가 이를 창조적으로 응용하기 시작한 후부터였다.

 

<기술의 영혼>은 이러한 기술의 역사를 돌아보며 인간과 기술이 함께 발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또 도구와 기계, 과학과 기술의 관계를 알아보고, 그 흐름과 발전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세상을 예측할 실마리를 던져준다.

 

기술과 관련된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는 동시에 기술이 선사한 혜택과 가능성에 대해 찬사를 쏟아지기도 한다. 하지만 무언가의 긍정적인 측면이나 부정적인 측면만을 들춰내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을뿐더러, 근본적으로 인간과 기술의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이러한 관점의 대립도 최근 와서야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장자> ‘천지’편에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공자의 제자 자공이 길을 가다, 밭일을 하는 한 노인과 만났다. 노인은 항아리로 물을 길어 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자공이 보기에 힘들게 일하지만 성과는 없는 듯 보여, 두레박 기계를 쓰면 편리하다고 노인에게 이르니 노인이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두레박 기계를 몰라서 쓰지 않는 것이 아니고, 부끄러워서 쓰지 않는 것이다. 스승에게 듣기를 기계가 있으면 기계의 일이 생기고, 기계를 부리는 자가 있으면 기계의 마음이 생긴다. 그런 마음이 생기면 순진결백(純眞潔白)한 것이 없어지고, 정신과 본성이 흐려져 도가 깃들 곳이 없게 된다.” 이에 자공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고 한다.

 

이 이야기 속의 노인에게서 오늘날 기술 진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물질적 기계의 진보보다 정신적 진보를 갈망하는 이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렇다면 자공에게서는 기술 분야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적극 수용하려는 이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야기 속 자공은 말없이 물러났지만, 이미 인간은 기계를 배제하고는 생각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기계가 없으면 인간은 존재하지 못할 것이고, 이제까지 존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라는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이 오히려 지금은 설득력 있게 들린다.

 

상반된 두 입장 중 어느 한 입장의 손을 들어줄 수 없다면, 그 입장들 가운데 놓인 핵심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일이 도움이 된다. 즉 기술에 대한 긍정론과 부정론, 어느 한 입장을 취하기 전에 기술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사실상 인류 역사의 여명이 밝아오면서부터 인간은 몇 가지 도구를 사용했다. 인간에게 도구를 다룰 줄 아는 본성이 존재했고, 인간은 이제까지 그 본성에 따라 도구를 사용해왔다. 인류 초창기의 도구는 우리의 조상들을 동물과 구분하는 결정적인 수단이었고, 태고의 조상들로부터 현생 인류로 내려오기까지의 흐름을 시간대별로 구분하는 데에도 가장 큰 도움을 준다.

 

그러한 도구의 발전 과정에서 어느 시점엔가 더 이상 단순한 도구라고 부를 수 없는 것들이 생겨난다. 이를 테면 간단한 도구들의 조합에 의해 새로운 도구들이 만들어지거나, 에너지와 같은 매개체를 이용해 작동시켜야 하는 것들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것들은 결국 기계 발명의 계기가 된다.

 

물론 ‘기계(mecchina)’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초기의 기계들은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기계의 의미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호메로스가 명시한 기계의 의미는 본래 ‘고안’, ‘새로운 장치’, ‘전략이나 계획을 행동에 옮긴다’는 의미를 모두 포함한 것이었다. 즉 기계는 특정한 결과를 얻기 위해 설계되어 만들어진 것, 목표 달성을 위해 정신적이라 할 수 있는 전략들을 행동으로 옮겨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기계는 인간의 생각을 물질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아이디어를 통해 기계가 탄생되는 것이 일반적이기는 하지만, 가끔은 기계가 새로운 기계 개발의 영감을 불러일으킬 때도 있었다.

 

그리고 기계에 대한 호메로스의 정의에서 유추할 수 있듯 우리가 흔히 기계라고 부르는 물질적 기계 이외에 어떤 목적을 위해 연락망을 구축하거나, 공동 작업을 통해 글을 쓰거나 수학 문제를 풀거나, 살아가면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사람의 머리를 이용하는 등의 행위 또한 넓은 의미에서 정신적 기계를 이용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기술을 발전시킨 가장 핵심적인 요인은 정신적 기계라 할 수 있는, 집단들 간 이뤄지는 다양한 아이디어의 교환이었다. 기술 발전은 한 집단이 여러 가지 기술을 명확화하거나, 그 기술들 중 한 가지의 의미를 완벽하게 구체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한 집단이 기술을 개발하고 다른 집단에서 또 다른 기술을 개발할 경우 집단들 간에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는데 이는 현재의 상황과 가장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앞에서 언급된 <장자>의 노인이 우려했듯, 기술로 인한 혼돈이 감지되고 있다. 시시각각 발전하는 기술 역시 긍정론자들의 희망처럼 기술 스스로 만들어낸 사회 문제들을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하고 있다. 이러한 상반된 관점에서 이 책은 사실 다소 긍정적인 입장에 서 있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사회적 문제들을 암시하기도 한다. 지은이 에도아르도 본치넬 리가 말하듯, 이 문명 속에 살고 있고, 그런 문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매일 매시간 듣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은이는 이에 대한 판단은 유보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제안은 많지만 표면적으로는 대체로 비슷하고, 구체적인 실현과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 해결의 시점이 가까워졌을 때에야 그 다양한 제안들의 모순점이나 차이점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주지해야 할 점이 있다면, 이제 기술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기계 역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해주는 중요한 요소다. 그렇다면 기술적 진보가 인간에게 유익한 것으로 남으려면, 기술이 인간에게 자기 파괴적 행위를 가하지 않으려면, 인간은 기술을 성찰해야 한다. 이 책은 이 지점에서 시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