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은 열여섯 살이야. 우리 친구하자”고 쓴 담임선생님의 일기에, “제 마음은 열여덟 살이에요. 오빠라고 불러주세요”라고 답장을 쓰는 아이.

 

사진_성깔 있는 나무ㅣ최은숙 지음ㅣ살림터 펴냄.jpg 다리를 다쳐 한동안 학교에 나오지 못한 선생님한테 한겨울 밤, 서로 공중전화를 바꿔가며 선생님 학교 언제 오실 거냐며 “선생님 보고 싶어요! 사랑해요!”를 외치는 녀석들에게 “나두 보고 싶어! 사랑해!” 하고 외쳐주는 선생님.

 

“울 아배가 어젯밤 술 먹고 전화해서 밤새 욕했어여.” 하고 한밤에 심난한 문자를 보낸 제자에게 “아빠도 힘들어서 그래. 얼렁 자.” 하고 무심한 듯 답장을 보내는 선생님.

 

‘우리 선생님이 집에 찾아오시는 달’에 할아버지 할머니와 사는 그 아이의 집을 찾아가 정성스러운 밥상을 후딱 비우고 설거지까지 마친 선생님은, 딸 삼겠다는 두 분이 주시는 된장, 고춧가루, 구기자나물에 쌀까지 선물을 받아 산길을 걸어 내려온다. 그러고 나서 선생님한테 슬며시 “근데 학교에서도 고모라고 불러요?”라고 물어보는 진짜 예쁜 아이.

 

집에 찾아오신다는 선생님이 반가워 땀이 흥건하도록 자전거를 달려 산길을 휘달려 마중 나오는 붙임성 있는 아이가 장학금 받는 데 필요한 서류를 받으러, 홀로 손자손녀 남매를 키우는 할머니 댁에 따뜻한 외가를 방문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찾아가는 선생님.

 

시인이자 교사인 최은숙의 <성깔 있는 나무들>에는 ‘눈물이 날 만큼’ 착한 아이들과 성깔 있는 나무들을 갈무리하며 아이들을 스승 삼아 공부하고, 시 쓰는 선생님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들은 자연과 어우러진 든든한 학교에서 서로 좋아하면서도 상처받고 이끌리면서도 밀어내고, 그러면서도 서로를 놓지 않고 부대끼며 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언뜻 지은이의 곁엔 가족과 친구를 사랑하고 자신에게 솔직하고 순박한 진짜 착한 아이들만 있고 이른바 문제 학생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무뚝뚝한 녀석들의 한두 줄 답장에서 아이들의 다정다감함과 섬세함을 읽어내는 선생님이 있기에, 그 아이들을 더욱 착한 눈으로 바라보는 선생님이 있기에 행복한 교실을 떠올리게 한다.

 

오늘 내가 만나는 이 아이들이 내게 아주 소중한 존재라는 걸 안다. 그리고 내 마음이 그들에게 이끌린다. 우리는 숲이다. 상처가 없는 나무도 아름답고 상처가 있는 나무도 아름답다. 비가 촉촉이 내리는 날도, 눈부신 햇살의 날도 아름답다. 그게 '자연스럽다'라는 말의 뜻일 것이다. 나무인 내가 나무인 그들과 서로 이끌려 숲으로 확장되어가는 소중한 하루, 소중한 장소가 '지금, 여기'라는 걸 나는 내 사랑스러운 친구들에게 속삭여주는 선생이 될 거다.


 

그렇다고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말썽쟁이들은 늘 지은이를 파출소로 병원으로 교장실로 불려 다니기 바쁘게 한다. 하지만 떼 뭉쳐 다니면서 사건이 터질 때마다 명단에 오르내리던 녀석들이지만 한 명씩 따로따로 떼어놓고 바라보면 ‘문제아’로 분류할 수가 없다고 지은이는 생각한다. 문제가 되는 행동은 있었지만, 문제를 일으키기 쉬운 상황들이 그 아이들에게 있었고 그것을 이겨내기엔 아이들이 너무 어리고 약했던 것이다. 지은이의 눈에 아이들은 적소(適所)를 찾아내기엔 아직 이른 성깔 있는 나무들이다. 산마루에서 비바람과 눈보라를 견디며 자란 나무는 단단하고 성질이 강하며 수분과 영양이 충분한 골짜기에서 자라는 나무는 약하고 부드럽다. 그 성깔대로 적소에 써줄 때 한 그루의 나무가 천년 고찰을 버티어주는 적재(適材)가 되는 것이다.

 

아이들도 나도 역시 성깔이 있는 나무입니다. 어떤 사람이, 혹은 어떤 장소가 나에 대한 이해 없이 제 뜻대로 이렇게 저렇게 잘라 정해진 틀에 끼워 넣으려고 할 때, 내 속의 생명력이 말없이 그 잣대와 틀을 비켜서는 걸 느낍니다. 아이들도 내 사고와 방식 앞에서 그렇겠지요. 우리는 목재소에서 성깔을 제거해버린 합판이 아니어서 싱싱하게 부딪칩니다. 좋아하면서도 상처받고 이끌리면서도 밀어내고, 그러면서도 서로 놓지 않고 부대끼며 살고 있습니다. 내 앞을 지나가는 아이들의 여리고 푸른 한 시절, 적소適所를 찾아내기엔 아직 이른 때입니다. 다만, 각기 만만치 않은 녀석들의 성깔이 제대로 깊어지도록 방해하지 않고 지켜보아 주고 싶습니다.


 

책은 교육문제를 다룬 그 어떤 책보다 아이들과 학교의 다양한 문제를 가슴 깊이 느끼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