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의대를 갓 졸업해 의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보건지소 의사로 군복무를 하게 된 20대 청년이 있다. 그는 마을 주민 1300명의 건강을 책임지는 보건지소 의사다. 그는 보건지소에 도착하기에 앞서 푸근한 미소와 삶의 여유가 묻어나는 넉넉한 시골의 모습을 상상했지만 발령 첫날부터 환상은 완전히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한 학년 전교생이 한 명뿐이라 언제나 전교 1등인 초등학생, 한국으로 시집온 베트남 아가씨, 한국전쟁 때 마을까지 내려온 빨치산과 전투를 벌였다는 할아버지, 등에 커다란 용 문신을 새긴 채 농사를 짓는 40대 청년, 술에 취할 때만 보건지소에 와서 허리가 아프다며 약을 타가는 아저씨, 3년 전 귀농을 해서 이제는 완벽한 시골 아낙이 다 된 아주머니, 설이 끝난 날 고향을 그리워하며 우는 할머니, 80이 넘었는데도 쓸 일이 있다며 비아그라를 찾는 할아버지…. 이곳 생비량면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삶의 모습을 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이미지_ 생초보 의사의 생비량 이야기, 양성관, 북카라반.jpg *생초보 의사의 생비량 이야기, 양성관, 북카라반.

 

실제로 본 시골의 환경은 열악했고 고달팠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었으며, 허리가 심하게 굽어 허리를 손으로 두드리는 모습이 걷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또 할머니들은 만성적인 통증에 시달렸다. 수십 년 동안 농사를 지어서 허리고 다리고 안 아픈 데가 없으며 등이 심하게 굽은 할머니들은 버스에 오를 때면 무릎과 허리 통증으로 얼굴을 잔뜩 찌푸리지만, TV에서는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매일 밤이면 인기척마저 사라져버리는 한적한 산골 마을은 그곳에서 홀로 잠들어야 하는 청춘을 참을 수 없는 고독으로 몸부림치게 했다. 밤이 되면 혼자 있어야 하는 관계로 사람이 그리워 길로 나가보지만 길 위에는 아무도 없다. 가로등과 집에서 새 나오는 빛이 길 위에 있는 전부일 뿐이다. 그 빛도 얼마 못 가서 길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청년 양성관은 외딴 산골 마을에서 홀로 지내며 나날이 늘어져 가는 몸과 밀려드는 권태에 괴로워하던 어느 날,  이곳 생활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마을과 사람들 그 생생한 삶의 현장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그러면서 꿈과 환상만이 존재하는 왜곡된 이미지가 아닌 보다 현실적인 시골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미 시골은 우리 곁에 항상 머물러 있는 현재 진행형도 미래형도 아닌, 조만간 사라지게 될 과거형이 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상남도 산청군 생비량면 보건지소에서 1년간 생활하며 겪은 에피소드를 묶은 <생초보 의사의 생비량 이야기>는 ‘리얼한’ 현실 속 시골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 할머니는 어쩌다 산청으로 시집을 오게 되었는데, 바다가 펼쳐진 고성과는 반대로 산으로 둘러싸인 이곳이 시집온 첫날부터 숨 막히게 갑갑했단다.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밤이면 밤마다 고향이 그리워서 남편, 자식 몰래 홀로 눈물을 삼키며 잠들었다고 했다. ‘그러면 고향에 한 번 가보시죠.’라고 내가 말하니, 할머니는 고향에 가니 집은 없어져버린 지 오래고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서순자 할머니에게는 더 이상 찾아갈 고향도 없는 것이다. 

 

✔ 톨레랑스(관용)가 중요시되는 프랑스에서조차 이민자 2세대들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소외되더니 결국 2005년에 이민자 폭동이 일어났다. 선진국이라는 프랑스가 이러한데 관용, 포용이라는 말 자체가 어색한 한국에서 자라게 될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은 과연 어떻게 될는지 큰 걱정이아닐 수 없다. 20년이 지나서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을 때, 한국 사회는 그들(?)을 받아들일 만한 관용을 갖추고 있을까? 아니면 지금보다 더 심하게 그들을 차별하고 소외시키려 들까?

 

지은이가 바라본 국제결혼이주여성, 혼자 살아야 하는 할머니, 그들은 고독했고 미래는 불안정했다. 분명 인정 넘치고 사람 냄새가 나는 시골이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 속에는 끝내 떨칠 수 없는 불안감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이는 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불안감이었다.

 

그렇지만 지은이는 시골과 도시의 ‘같으면서도 다른 모습’을 비교해 흥미로움을 자아낸다. 가령, 어르신들이 많은 시골에서 특히 유용한 다양한 삶의 이기(利器)인 유모차를 개조한 실버카는 할머니들의 약한 다리를 지탱해주고 짐도 실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 전기의 힘으로 가는 전동휠체어와 시골 지형에 강한 사륜 오토바이도 유용하다. 그러나 여전히 시골에서 이동하기란 쉽지 않다. 차로 15분 거리를 가기 위해 하루 다섯 번밖에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려야 하며, 10분 거리를 가기 위해 택시 회사에 전화를 걸어 비싼 요금을 내고 타야 한다. 느리게 걸으며 삶의 여유를 즐기는 것도 좋지만, 시골에서 몸이 자주 아픈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는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다.

 

지은이는 마을 주민의 건강을 책임지는 보건지소 의사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고 고백한다. 초등학교 1학년 꼬마부터 국제결혼이민자, 귀농인,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다양한 마을 사람들이 들려주는 다양한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름대로 시골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해 여유를 잃지 않는 자세보다는 유머를 잃지 않는 자세를 유지한다. 때로는 자전거를 타고 왕진 겸 약 배달을 나가기도 했으며, 가을에는 감을 따러 다니며 마을 사람들의 삶 속 깊은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었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심드렁하지만 날카로운, 우울하지만 유쾌한 시골 체험기를 소개하면서 사람 냄새를 느낄 수 있는 시골 마을의 구수함을 전하고 있다.
 

[지데일리/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