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이성의 영역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모습을 갖추기 훨씬 오래전부터 우리는 육아와 관련해 더없이 정확한 본능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오랜 지식을 철저히 무시해왔고, 지금은 아예 연구자들까지 전임으로 고용해 우리 아이들을 대하는 법, 나아가 우리 자신에 대한 태도까지 맡기기에 이르렀다.”

 

남미 밀림에서 선사시대를 유지하며 사는 원시부족 예콰나족. 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육아 방식을 관찰한 결과인 진 리들로프의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육아법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인간의 본성과 육아의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 진 리들로프, 강미경, 양철북

 

책에 따르면, 예콰나족 엄마는 아기를 품에서 내려놓는 법이 없다. 아기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서, 늘 아기를 품에 안고 물을 긷거나 음식을 만들거나 빨래를 하면서 마을 사람들과 수다를 떤다. 아기는 엄마 품에 안겨서 하루 종일 이리저리 흔들리며 빛이나 소리, 온도의 변화, 곁을 스치는 나뭇잎 같은 촉감을 감지하며 세상을 경험한다.

 

이에 반해 우리 문명 세계의 아기들은 희미한 빛과 멀리서 들리는 소리만 약하게 감지할 뿐 원하는 자극을 거의 받지 못한다. 더구나 가만히 누워 있는 아기는 넘치는 에너지를 배출할 길이 없어 쉴 새 없이 팔다리를 휘젓고 몸을 뻣뻣하게 긴장시킨다.

 

예콰나족 아기는 원할 때는 언제든지 원하는 만큼 젖을 먹을 수 있다. 문명 세계의 아기들처럼 수유 시간을 지킨다고 울며 보채는데도 못 먹는 경우는 없다. 아울러 젖을 먹은 후 트림을 하는 일도 없다. ‘수유 후 트림’은 보통 아기의 생리적 현상으로 알려져 있지만, 거의 움직임 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아기들한테서나 나타나는 소화불량 현상이다.

 

예콰나족 아기는 엄마와 함께 내내 사람들 속에 있으며, 아기에게만 집중하는 엄마가 흔히 보이는 걱정과 예민함과 피로와 짜증을 겪지 않는다. 막 아기 티를 벗은 어린아이가 아기를 돌보는 일도 흔하다.

 

아기가 기어 다니기 시작하면, 아기는 거의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마음껏 기어다니며 세상을 탐험한다. 주위 어른의 “거긴 안 돼, 위험해”라거나 “이건 지지, 만지면 안 돼”와 같은 식의 제재를 받지 않는다. 그래도 아기가 다치는 일은 없다. 마음껏 돌아다니며 세상을 탐험하던 아기는 배가 고프면 돌아와 실컷 젖을 빨 뿐이고, 엄마는 그제야 아기의 욕구를 따뜻하게 받아줄 뿐이다.

 

좀 더 자란 아이들은 또래들끼리 어울려 어른들을 흉내 내어 활을 쏘아보고 노를 저어보며 삶에 필요한 기술을 익힌다. 주위 어른들은 아이에게 삶에 필요한 기술들, 즉 활쏘기, 노젓기, 사냥하기, 음식 만들기 등을 가르쳐줄 법하지만, 그런 일은 없다. 어른은 그저 묵묵히 자기 일을 할 뿐이며, 아이는 옆에서 어른이 하는 일을 보고 잔심부름을 하며 스스로 깨우칠 뿐이다.

 

✔ 성취감처럼 꽉 찬 느낌은 경쟁과 승리를 통해 나온다는 개념은 프로이트가 말한 이른바 ‘형제간의 경쟁’을 확장한 데 지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어머니를 놓고 다퉈야 한다는 이유를 들어 우리 모두가 형제나 자매에게 질투와 증오를 느낀다고 보았던 듯하다. 하지만 프로이트 주변에는 박탈당한 사람들만 있었다. 만약 예콰나족과 알고 지낼 기회가 있었다면 아마도 그는 경쟁과 승리는 그 자체로 목적이라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아예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을 것이다. 따라서 경쟁과 승리를 인간의 본성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아이들은 또래들끼리 재미로 활을 당겨보고 카사바(음식의 주재료)를 강판에 갈아보고 아기를 돌보기도 하면서 스스로 일의 이치를 터득한다. 어른들은 그저 자기 일에 충실하면서 아이들이 도움을 청하거나 무엇을 물어볼 때만 응해줄 뿐이고, 아이들은 어깨너머로 보거나 잔심부름을 하면서 스스로 터득할 뿐이다.

 

앞서 세상 탐험에 나선 아기와 마찬가지로, 칼이나 활과 같은 위험한 도구를 가지고 놀아도 아이들은 다치지 않는다. 간혹 사고가 생기기는 하지만, 문명사회에서 어른들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듯, 아이들을 ‘위험한’ 도구가 놓여 있는 곳에 내버려둔다고 해서 꼭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 신비로운 현상은 사실 무슨 마법이 아니라 인간을 대하는 태도가 문명사회와 많이 다른 데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 예콰나족 사이에서는 누가 누구의 주인이라는 개념이 없다. 다시 말해 ‘내 아이’나 ‘당신 아이’라는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다. 상대의 나이가 몇 살이든 어떤 일을 억지로 시킨다는 말은 예콰나족 행동 사전에는 없다. 흥미롭게도 그 누구한테서도 다른 사람을 억압하려는 충동은 둘째 치고 영향을 미치려는 충동조차 찾아볼 수 없다. 아이의 의지는 곧 아이의 동인이다. 예콰나족은 아이가 신체적인 힘이 열등해 어른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고 해서 아이를 어른보다 덜 존중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무리 어른이라고 해도 노는 방법, 식성, 잠자는 시간 등과 관련해 아이의 성향을 거스르는 지시는 내리지 않는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문명사회의 병적 징후들을 ‘연속성 개념(the continuum concept)’에 입각한 육아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연속성 개념이란 간단히 말해, 종(種)을 그 종으로 지속시키는 성질이다. 이러한 개념에 비춰보면, 우리 문명사회는 갓난아기일 때부터 어미 품에 있어야 하는 ‘품 안’의 욕구를 채우지 못한 ‘근원적인 행복’을 잃어버린 사회다.

 

이 근원적인 욕구불만은 어른이 돼서도 짜릿한 성취감, 인정받고 싶은 욕구, 자신을 위로해줄 ‘어머니’를 끊임없이 찾아 헤매는 ‘이성 편력’ 등으로 나타난다. 경쟁심 가득하고 승부욕에 차 있는 사회, 행복에 충만한 삶이 일상에 깊이 내재된 것이 아니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삶의 목표인 사회, 그래서 유아기 때 박탈된 행복을 되찾고자 돈이나 지위, 권력 등과 같은 평생 행복의 대체물들을 얻기 위해 질주하는 사회, 이것이 우리 문명사회의 특징이다.

 

지은이의 연속성 이론은 아이에게 무조건적인 지지와 신뢰와 사랑을 주는 것이 한 인간의 형성에 얼마나 중요하며, 한 사회가 아이를 대하는 방식은 그 문화의 성격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남미 밀림의 원시부족 예콰나족의 생활방식과 육아법을 관찰하고 인간의 본성이란 무엇인가를 숙고하면서 ‘인간의 본성에 맞는 육아법’을 주창하는 이 책은 서구 합리주의가 지금껏 우리에게 가르쳐온 육아법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을 하게끔 이끌어준다.

 

[지데일리]
http://gdaily.kr/21135